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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사회학」끼어들다.(04.8.8)

한겨레에 책 소개가 났다. 입에 침이 말랐다. 사실 제목도 재밌어 보였다. 가족들과 서점에 들른 김에 한권 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게 읽으려고...

문제는... 늘 그렇듯... 읽을만한 수준의 번역이 아니라는 것. 짜증이다. 대강 죽죽 넘기련다. 사실 한글 문장이 좋지 않은 번역은 죽죽 넘기기도 힘들다.

얼마 전에 내 동료인 비나리가 한국 축구에 관한 글을 썼다가 매니아들로부터 욕 바가지를 뒤집어 썼다. 이천수와 차두리가 계급적으로 어떻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가 어떻고... 뭐 그런 일에 그리 열들을 올린다냐, 하는 생각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고.

입에 침이 마르는 한겨레 책 소개 기사를 읽고 충동 구매한 책인데, 어렸을 때 책 충동 구매하고 후회했을 때 생각난다.

원저자한테 괜히 내가 미안타. 원저의 깊이를 느낄 정도로 읽으려면 이 번역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걍 죽죽 넘길란다.

하여간 이 책의 인터셉트 덕분에 [인간의 내밀한 역사]는 며칠 보류.

네이버 [독서일기] 2004.08.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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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뭐기에 우리는 미치는가

한겨레 2004.8.7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축구는 하나의 ‘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섬에서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의견은 허용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프로스포츠 산업 전체를 봐도 그렇거니와 이 땡볕에도 각급 대표팀 경기에 열광하고 주말이면 수십만 명이 맨땅에서 에너지를 쏟아내는데도 그에 관한 이론적 공부는 이토록 소홀할 수 있었는가, 의문이다.

축구라는 이 ‘기이한’ 집합적 행동은 늘 저 1970년대에 생성한 빈곤한 수사학에 의지할 뿐이었다. 모든 미디어는 ‘벼락 같은 중거리슛’, ‘통한의 역전골’, 그리고 ‘태극전사’로 수미일관해왔다. 진부하고 낯간지럽다. 이 사회의 어느 한 분야가 사물의 본질과 이토록 거리가 먼 앙상한 언어로 수십 년을 제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이다.

‘어휘의 빈곤’을 넘어서 ‘철학의 빈곤’임이 틀림없는데 더 궁극적으로 ‘축구’를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행위로 인식하고 그것에 대하여 한층 풍요롭고 진지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이제서야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 계기는 2002년 월드컵이다. ‘그 일’로 인해 축구에 대한, 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었다. 큰 서점의 한 귀퉁이에 뼘으로 두어 번 재면 그만인 서적들도 이제는 한 뼘 정도 더 잡아줘야 할 만큼 늘었다. 이를테면 사이먼 쿠퍼의 <축구, 전쟁의 역사>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는 축구를 지구적 규모에서, 그리고 인간 내면에 응축되어 있는 무한한 열정과 또한 그것을 억제하는 현대 사회의 제도적 억압의 측면에서까지 성찰하게 도와준 소중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제대로 된 교본이 나온 것이다. 스코틀랜드 에버딘 대학교에서 축구를 프리즘으로 삼아 현대 사회를 성찰해온 리처드 줄리아노티의 <축구의 사회학>. 정녕 열혈 축구광임을 자인한다면 축구장에 가기 전에 서점부터 들려야 할 만큼 반가운 책이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이 책의 앞부분만으로도 지은이에 대한 깊은 신뢰를 느끼게 될 것이다. 번역서를 보면 이따금 지은이가 국내의 독자들을 위해 인사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는 ‘주례사’다. 게다가 자신의 책이 외국의 이런저런 나라에 번역되었음을 공지함으로써 연구자의 업적을 반증하려는 욕심도 없지 않다.

그런데 줄리아노티의 ‘인사말’은 전혀 다르다. ‘동방의 작은 나라가 월드컵의 기적을 이뤄 축구 종주국의 일원으로 축하한다’는 식의 밋밋한 격려사는 전혀 없다. 그는 다섯 가지 측면에서 한국 축구의 성과와 과제를 짚고 있다. 특히 케이-리그, 서포터스, 축구마케팅, 분단국가에서의 축구 등에 대하여 짧지만 강력한 지적을 적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이 학자가 한국 축구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매우 간략한 인사말이지만 그럼에도 그 행간의 깊은 시선은 그가 축구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이해력의 원천을 갖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자칫 건조해 보이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축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데 요긴하다. 왜 축구가 20세기의 중요한, 특히 세기말과 세기초를 넘어서 오늘에 이르러 가히 ‘세계화’의 대표적인 증거로서 지구촌의 유일한 ‘모국어’가 되어 세계 시민권을 얻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명으로 이 책은 출발한다. 이렇게 망원경을 사용하여 축구와 현대 사회를 일별한 줄리아노티는 카메라의 렌즈를 계속 좁혀가면서 서포터스, 축구장, 미디어, 축구 스타, 전술, 정치학 등으로 축구를 세밀하게 살핀다.

옮긴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되겠는데, 책날개의 이력을 보니 축구와는 거리가 먼 번역자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생업과 관련 없는 일에 대해서 다만 ‘축구’라는 이유로 몇 년씩 붙들고 앉아서 난해한 학술 용어가 각 쪽마다 출몰하는 책을 번역해냈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열이 아니고서는 감내하기 어렵다. 나는 오로지 축구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 텅 빈 경기장의 한 구석을 채우는 서포터스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과 같은 맥락에서 옮긴이의 이 ‘순결한 아마추어리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축구장에 같이 갈 만한 벗이 한 명 더 생긴 즐거움, 숨기지 않겠다.

그러니 이제 축구장으로 가보자. 한 손에 입장권을 들었다면 다른 손에는 <축구의 사회학>이다. 축구장 안팎의 함성과 구호들, 카메라와 선수들, 심판과 관중들. 곧 당신의 내면까지 전혀 새롭게 이해될 것이다.

정윤수/축구평론가

출처 : http://books.hani.co.kr/section-009100003/2004/08/0091000032004080615534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