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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삶들, 시인의 손길, 나의 연대 (시민의신문 99.7)

쓸쓸한 삶들, 시인의 손길, 나의 연대

신경림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일찍 늙어들 가던 시절이었다. 통조림 같은 세상을 조롱하느라 통조림을 닮아버린 시들이 쏟아질 때였다. 권태, 혹은 정신분열이 지식인의 장식품이 되고 약삭빠른 치들은 뜨거웠던 지난날이 결국 허망했노라는 그런 시와 소설, 연극을 팔았다. 팔리는 게 힘이었으므로 풍자는 더욱 더 광고 문구와 왕가위 풍 영화를 닮아 갔다. 구십 이삼사년이었다. 연대와 변혁을 이끌던 시대정신은 그렇게 늙고 있었다. 시절을 슬쩍 비껴 군대에 있던 나도 세상의 풍문에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세상은 늙어가면서도 더 화려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여전히 순진하던 친구가 보내온 책이 신경림 시집이었다. ‘쓰러진 자의 꿈’이라…. 고맙긴 했지만 시집은 내무반 관물대에 고이 처박혔다. 시집을 다시 꺼내게 된 것은 순전히 다른 읽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취침등 아래서 날은 밝고 말았다. 깊숙한 곳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비판가들이 너무 빨리 늙어 버린 대신 노시인이 홀로 세상의 약한 것들을 보듬고 있었다. 세상은 시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쓰러지고 밟히는 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억세게 이어가는 생, 이제 사라질 운명인 생, 막 허망한 일생을 마친 생이 있었다. 눈발 날리는 새벽 장바닥 대폿집엔 해장국을 들이키는 미장이와 청소원, 언청이와 곰배팔이가, 낙동강 어디엔 등뼈 굽은 잉어를 낳는 꿈에 놀라 수돗가에서 구역질하는 가겟집 맏며누리가, 화사한 봄날 북한산 어귀엔 빈대떡과 소주를 파는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 그 삶의 마지막 고샅이 있었다. 무너져 가는 토성(土城), 귀먹은 폐역(廢驛) 역장, 어떻게 여태 거기 있었나 싶게 가늘디가늘게 이어가는 생들이었다. 시는 시인의 눈길이고 손길이며, 연대였다.

시인은 한 발 더 나간다.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생글거리며 웃는 예쁜 꽃목이 어이없이 부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 애타게 울부짖는 안타까움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인은 혁명을 자임하기보다 쓰러지는 것들을 지켜보는 ‘허망한 눈길’에 머문다. 그들을 바라보고 보듬고 같은 꿈을 꾸는 것이 시인의 몫이었다. 그 다음은 나의 몫이었을까?

군을 마치고 환경연합에서 일을 시작한 나는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는, 할 일을 찾지 못하겠다는 탄식을 종종 접하곤 했다. 세상 낮은 곳엔 쓰러지고 터지는 쓸쓸한 삶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나 또한 그 일부라는 것을, 애써 눈감지 않는 한 보지 못할 리 없지. 따뜻한 마음, 연민, 공감, 낮춤을 잃으면 연대, 혁명, 희망이 있을 리 없지.

많은 젊은이들이 이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다. 「화톳불…」, 「홍수」, 「봄날」, 이런 시편을 읽다가 나와 비슷한 꿈틀거림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오랜 친구인 양 만나 대폿집을 향해도 좋을 것이다.

(시민의신문 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