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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와 출판::

[과천외국어고등학교 신문 원고] 교양에 대한 후회

과천외고에서 학교신문에 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네요. 청소년들에게 쓰는 글이라 더 부담이 되더군요. 결국 재미없는 교양 타령이 되었지만...^^



교양에 대한 후회

서형원 | 과천시의회 의장
http://ecopol.tistory.com 
twitter: @seohyungwon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역사를 배웠습니다. 그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역사는 제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역사란 이런 저런 사건들이 뒤죽박죽 나열된 것으로밖에 보여지 않았고, 옛 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더구나 연도를 암기한다는 것이 저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불가능하게 여겨졌습니다.

역사는 재미없다. 이런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대학을 다니며 사회에 대한 자기 시각을 키우기 위해 친구들과 철학, 역사,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토론했지만,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경제학 전공자로서 필수과목인 경제사와 경제학사, 근대경제사, 경제학설사 등등 사(史)라는 사는 다 싫어했으니 저의 역사 알레르기는 참 심한 편이었지요.

일에만 매달리느라 독서를 멀리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역사가 얼마나 가치 있고 흥미진진한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삶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핏 보면 완전히 새롭고 나 혼자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비슷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도전해왔음을 이제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빌려야 할 모든 지혜는 길고 복잡한 역사의 어딘가에 반드시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시 읽었습니다. 500년 전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거듭하던 이탈리아의 한 군주에 바치는 조언이었던 이 작은 책이, 민주주의가 꽃핀 오늘날의 정치와 리더십에 대해서도 본질을 꿰뚫는 조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로부터 1,5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그의 시대에 관한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지혜가 오늘날의 저에게 다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일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실 기술적인 지식들은 머릿속에 꼭 넣어두지 않아도 필요할 때 찾아내고 적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문학, 철학과 같은 교양은 그때그때 찾아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몸에 밴 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많은 독서만이 사람과 사회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서에 토론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지식이 모자란 사람에겐 배워가며 일하자고 괜찮다고 말하지만, 통찰이 없는 사람과는 같이 일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성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할 그때가 돼서는 다시 습득하기 어려운 것이 교양이며, 교양의 힘에서 나오는 지혜와 통찰력입니다. 저는 지금도 역사라는 지혜의 보고를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서를 멀리한 탓에 기초체력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Heading for the world and for future.” 과천외국어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세계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실 분들이십니다. 기초체력이 부족한데 배낭을 열심히 싼다고 한들, 먼 여행이 즐겁고 성공적일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사회로 나아가기 전까지, 정신의 기초체력이 될 교양의 습득에 의식적으로 시간을 투자한다면 저처럼 뒤늦게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