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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와 출판::

[오피니언]거인의 죽음과 풀뿌리 정치를 빚는 촉매들 ::: 시민사회신문 2009.8.24

거인의 죽음과 풀뿌리 정치를 빚는 촉매들
서형원 과천시의회 의원


거인의 정치가 저문다. 풀뿌리 현장에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 믿고 일하는 나는 무얼 하고 있나?

지방선거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글을 청탁 받아 놓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았다. 우연인 듯 한국 현대사의 거인들이 잇달아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유독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 시대거 저무는 풍경을 선명히 떠올리게 한다.

김대중. 터지기 직전까지 압축된 한 시대의 숙제가 비범한 의지와 역량을 가진 한 사람과 일체가 되고 그이의 간난신고와 죽음의 위기가 곧 그 시대의 고난이자 절명의 순간이었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거인. 그가 꺾이지 않는 거인이었던 탓에 우리는 한 시대를 버텨냈고 넘어섰다고 말하면 지나친 감상일까?

그의 집권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잔혹했던 한 시대를 무사히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쓸어내리게 하는 안도감이었다. 그가 지니고 떠난 것은 독재의 극복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영광만은 아니다. 나는 그가 과거 정치의 부정적 유산까지 짊어지고 떠남으로서 우리에게 커다란 빈자리를 남겼다고 믿는다. 한 거인이 한 시대의 정치적 과제를 떠안고 그를 아버지로 삼는 슬하 정치인들을 거두어 키우던 정치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지금 이후로 누가 다시 거인을 요구하겠는가?

하지만 몹시 당황스럽다. 거인만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가 시들고 있다. 민주 정치의 꼴은 갖춰졌지만, 정작 정치를 떠받치는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거는 기대, 희망, 참여의 의욕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거인의 슬하에서 자란 야당 정치인들은 스스로 거인이 될 리도 없겠거니와 시대에 걸맞은 방식으로 정치를 회복할 아무런 계획과 의지도 갖지 못한 채 아버지 잃은 자식으로 우왕좌왕하는 꼴이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며칠 더 연명하려는 모습만은 제발 보지 않게 되길.

거인이 없는 정치에 도전해야 한다. 고만고만한 ‘보스’들이 내가 더 크다고 떠들고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그이들에게 정치적 의사표현을 대신해달라고 맡기는 식의 정치가 더 이상 통할 리 없고 우리 사회에 긍정적일 수도 없다.

시민의 정치적 행동과 발언은 여전히 뜨겁다. 아스팔트, 캠퍼스, 공장을 달구었던 독재타도, 민주화 쟁취의 열기도 대단했지만, 지금 온라인과 거리와 마을을 채우고 있는 시민의 정치 의지는 더 구체적이고 직접이며 능동적이다. 다만 이것은 정치가 되고 있지 못하다. 거인의 몸을 대신할 새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풀뿌리 정치’라는 그릇으로 평범한 사람들 스스로의 정치를 담아내보자. 시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거인이나 자칭 보스들에게 위탁할 필요가 없는 정치다. 이런 정치가 가능하냐며 여전히 묻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경계를 넘어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정치 소통과 의지 형성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다. 풀뿌리 정치를 곤란하게 하는 장애물은 없다. 정치를 시민의 것이 아닌 자기 밥그릇으로 여기는 정치인들이 그 소통과 의지 형성 과정을 도막내고 있을 뿐이다. 뽑아주거나 높여주면 ‘내가 대신’ 좋은 정치를 보여줄 테니 선거 때가 아니면 잠자코 계시라는 정치가 시민을 구경꾼으로 몰아내고 있다.

풀뿌리 정치에 거인이나 보스는 필요 없지만 당신이나 내가 촉매 역할은 해야 한다. 여전히 뜨거운 시민의 정치적 의지와 행동을 정치의 주체가 되는 소통으로 잇기 위해서 아주 많은 촉매가 필요하다. 기초의회 의원도 이런 촉매다. 자기 생각으로 발언하고 정책을 만드는 것으로는 그저 말단 직업 정치인을 벗어날 수 없다. 행정의 잘잘못 따위를 담은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시민의 의사 표현과 참여의 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며 이를 통해 주민의 정치 역량을 키우고 지역의 변화로 이어간다면 시군구 의회 의원은 새로운 정치를 창조하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나 특별시장도 대신할 수 없는 생활 현장의 창조 활동이다.

내년 6월의 지방선거에서 풀뿌리 정치, 시민 스스로의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실천을 통해 확인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여러 지역과 분야에서 활동해온 풀뿌리 운동의 구성원들과 시민운동가들이 촉매 역할을 감당하자고 제안한다. 좋은정치씨앗들이라는 모임을 중심으로 아마도 다음 달에는 2010년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새로운 네트워크가 널리 제안되고 구성에 착수할 듯하다.

시민의 정치 행동이 그저 거리와 온라인에만 국한되는 것은 답답하다. 지금은 뜨거운 것 같지만 같지만 스스로 정치 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소모되고 말까 염려된다. 다시 보스의 정치로 회귀하게 해서 정치 자체에 대한 염증과 절망을 키우게 해서도 안 된다.

거인의 족적을 묵상하면서, 뜻있는 활동가들에게 함께 새로운 정치의 촉매 역할을 하자고 권하는 마음이 간곡해진다.

시민사회신문 오피니언 진단기고 (2009.8.24)
http://www.ingo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