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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음악::

[옛블로그05.12.19]<넬로와 루벤스>


어제 모처럼 온이와 도서관에 갔다. 플랜더스의 개. 어린이 방에서 그림책으로 읽어줬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가슴근처와 목과 얼굴 일대에서 주책맞은 현상이 벌어져 제대로 읽어줄 수가 없었다.



원작에 가까운 좀 두꺼운 책을 집에 빌려왔다. 혼자 읽어보고, 어제 오늘 온이에게 읽어주고...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과 표현이 너무 많은 책인데 온이는 묘하게 몰두한다. 그전에 읽은 어떤 책보다. 할아버지가 죽기 전, 넬로가 풍차 방앗간의 방화범으로 몰리고 이웃들의 냉대를 받게 되고, 자신도 알지 못한 자신의 유일한 재능과 꿈을 미술대회에서 인정받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는 그 순간까지 읽어줬는데, 그 다음엔 읽어주고 싶지가 않다. 엄마 한테 떠 넘기든지...



'위다'라는 필명의 작가는 참 담담하게 한 소년의 성장과 꿈, 가난과 고통, 희망과 좌절, 찰나의 환희와 죽음을 그렸다. 플랜더스의 개는 성장소설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결국 성인이 된다는 뉘앙스로 끝나는 그 부류 소설과는 달리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 때문에 딱히 성장소설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좀 꽉 막히고 딸을 지나치게 사랑할 뿐 본디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알루아의 아빠 코제 씨와, 늘 상냥한 사람들이지만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코제 씨의 억지를 받아들이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평범한 마을 사람들. '본디 나쁜' 사람 없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정함이 지배하는 현실. 단 하나의 꿈으로 가련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재능 있는 소년이 그 앞에서 절대적으로 멈춰 쓰러질 수밖에 없게 된 그 현실을 참 담담하고 심지어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 담담함과 아름다움이 더 크고 리얼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달까?



위 그림은 넬로가 죽음과 바꿔가면서까지 보고 싶어했던 안트베르펜 출신 화가 루벤스의 "십자가로 올려지는 예수"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중 앞의 것.



"돈이 없는 사람은 볼 수 없게 하려고 그림을 천으로 가려 두다니 말이 되니? 캄캄한 어둠 속에 아름다운 그림을 가둬 두다니 너무해. 부자들이 와서 돈을 내야만 빛을 볼 수 있는 그림이 된 거야. 아무도 그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아, 난 저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나 루벤스는 풍족하고 잘 나가던 화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랜더스의 개 만화 주제가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기회가 되면 어렸을 때 명작동화로 뗀 책 안 줄인 책으로 다시 보기를 하고 싶다는 소망... 몇 년 됐다.)


http://blog.naver.com/ecopol/150000359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