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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정치" -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인 오늘날 - 여러분은 비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흥분이 항상 진정한 열정인 것은 아닙니다 - 갑자기 곳곳에서 신념윤리가들이 아래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다수 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뽑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나는 우선 그들의 신념윤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내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묻습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이들 열 명 중 아홉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낭만적 감흥에 도취하고 있을 분인 허풍선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인간적으로 나의 관심을 끌지 않으며 또 나를 추호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한 성숙한 인간이 - 나이가 많고 적고는 상관없습니다 -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정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오.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내적으로 죽어 있지 않은 자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절대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함께 비로소 참다운 인간,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중. 막스 베버 / 전성우 역
문단 구분은 인용자


사실 이 글에서 신념윤리가들에 대한 지적은 지나친 면이 있다. 자신의 윤리를 뒷받침할 내적 힘에 관해서라면 정치가들보다는 신념윤리가들에게 더 기대할 게 많다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들어 말할 수 있다. 베버는 당시의 비창조적 흥분에 빠진 사람들에게, 특히 이 강연의 청중인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에 한쪽으로 치우쳐 말했을 것이다. 물론 그래도 이 글의 메시지는 옳고 중요하다.

근데 왠지 두 윤리의 논쟁과 충돌, 그리고 마지막에 지적한 "여기까지가 내 신념이 허용하는 선입니다"하는 세속 정치인(혹은 사업가)의 '감동적' 진술은 일본망가 같은 데서 많이 본 장면이다. 그리 심오하게 생각할 건 없다. 물론 그래도 이 글의 메시지를 익히지 못하고 책임 있는 일을 한다는 건 참 곤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