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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홈피07.2.25] (기록중)한국문학통사1/조정래

<한문(학) : 동아시아 공동문어(문학)>
중국의 백화가 아닌 한문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해온 '공동문어'. 여러 민족이 함께 쓴 '공동'의 자산이고, 구어의 변화를 거부하고 어법이 고정된 '문어'이다. 공동문어를 사용한 문학은 공동문어문학이다. 산스크리트문학이 남아시아의 공동문어문학이고, 라틴어문학이 유럽의 공동문어문학인 것과 같다. (+ 아랍어) 문명권마다 공동문어가 있어 공동문어문학을 창작한 시기를 인류는 함께 겪어왔다. 그러면서 한문은 다른 공동문어와 차이점이 있다... 소리내어 읽는 한문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 독법으로 읽는 한문은 우리말 문어체이다. 한문은 다른 공동문어보다 민족적 특성을 더 많이 지녔다. (23ㅉ)

한국문학은 구비문학, 한문학, 국문문학의 총체임을 분명하게 하고, 그 셋을 대등하게 다루면서 상관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문학사 서술의 새로운 과제이다. (25ㅉ)

<원시에서 고대로>
원시시대의 신앙서사시나 창세서사시를 대신해 건국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건국서사시가 나타나면서 고대가 시작되었다.

<건국서사시와 고대자기중심주의>
고대의 건국서사시는 정복전쟁의 주역인 군사적인 귀족의 문학... 건국의 시조가 하늘이고, 지배자가 하늘과 통하고 있어 자기 집단이 배타적인 우월감을 가져 마땅하다는 고대자기중심주의를 건국서사시에 나타냈다. (38ㅉ)

<동아시아 공동문어의 시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하자, 로마제국 통치지역에 라틴어가 이식된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97ㅉ)

<고대의 자기중심주의와 중세의 보편주의>

<중세 보편주의에서 한문과 불교의 역할>

고구려, 백제, 신라... 전쟁 이후... 지배체제가 확립하는 과정...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수용하고,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요청되어 중세화의 길로 들어섰다.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 민심을 얻어야... 순장 금지...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지위의 차이가 있어도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중세보편주의 사고. 자유민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이 생산량 증대에 유리 -> 지배자에 더 큰 이익. 덕치가 곧 능률. (110ㅉ)

건국서사시를 노래하던 시대를 지나 한문을 쓰는 시대에 들어서서 문학담당층 구성에 커다란 변화. 기능인인 문인의 등장. (114ㅉ)

한문을 수용한 것이 우리말 문학에 의한 자기중심주의가 기층문화의 영역으로 내려가서 한문학을 상대로 힘겨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점에서는 불행. 그러나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와 세계종교를 받아들여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온 것은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나타난 공통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지혜를 서로 나누며 고대의 폐쇄성, 불평등, 비논리를 시정하는 사회변화를 겪고, 이념적, 예술적 향상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공동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민족어를 국어로 육성할 수 있었던 곳은 하나도 없다. 필리핀이나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런 곳은 근대에 유럽열강의 침략을 받고 침략자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와 세계종교를 이룩하는 데 어느 민족의 조상이 주도적인 구실을 했는가를 문제로 삼는 것은 근대민족주의적 발상. 소급 적용하여 중세 세계제국이 어느 민족의 나라였는지 가리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민족국가로 나누어 문명권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부당. 중세보편주의는 세계제국의 유산을 공유했다. 동아시아의 중세를 중국에서 한족이 세운 거대제국이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 북방 이민족의 역할. 안에서는 북위가, 밖에서는 고구려가 선두에 서서 한문을 공동문어로 만들고 불교를 정착시킨 것이 중세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전환점.... 다른 어느 문명에도 뒤지지 않는 동아시아문명을 자랑스럽게 이룩. 국가를 들어 말한다면, 중국의 여러 왕조, 중국 서남쪽의 남조, 한국의 삼국, 그리고 일본은 처음부터 동아시아문명권 정회원이었다. 뒤에 월남과 유구가 추가. 중세문명의 공유재산을 어느 민족국가의 사유물로 보는 것은 잘못. 다른 문명권에서는 그런 착각 않는다. (114-116ㅉ)

한문을 사용하고 유학을 받아들여 중세화의 길에 들어선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내면정신의 성장의 과업을 불교가 담당. 유학은 정치의 형태나 제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쳐,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답하는 과업은 불교가 맡아야 했다. 불교는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와 나란히 판도를 넓혀나간 보편종교이며 중세문명권을 형성하고 구분하는 구실을 함께 했다. (티베트불교와 구별되는) 한문불교는 동아시아가 한 문명권이게 하는 정신적 실체를 제공했다. 북위를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국가가 크게 기여. 운강, 용문, 돈황 등지의 놀라운 유적들. 한국, 일본, 월남, 유구 등이 동참해 여러 민족이 함께 이룩한 창조의 성과를 더욱 풍부하게. 불교가 동아시아의 공동이념이 되어 고대의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중세의 보편주의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최상의 논리를 불교가 제공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 건국신화나 서사시의 오랜 권위 상실. (183ㅉ)

일본에 갔던 발해 사진들은 흔히 보기 어려운 환대를 받고, 지은 시를 일본에서 소중하게 보관했다...당나라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본이 믿을 곳은 발해였다... 발해가 전해준 역법을 일본에서 8백 년 동안 사용했다. (247-248ㅉ)

독서삼품과(원성왕4, 788)는 과거제도와 근접된 제도였지만... 진골귀족이 아니라면 행정실무에 종사하는 기술자 이상의 지위를 차지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골품제의 엄격한 원칙이었다. 골품제는 철폐될 수 없고, 본격적인 과거제가 끝내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 신라사회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유학이 불교를 대신해서 지배적인 이념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진골귀족은 유학을 정치의 이념이 아닌 수단으로 삼았다. 유학이나 한문학 전문가는 권력의 핵심과는 거리를 두고 실무적이거나 장식적인 구실을 담당하도록 하는 기본 방침이 변하지 않았다... 육두품 출신의 문인들은 줄곧 갈등을 느끼고 때로는 비판자 노릇을 했다. 실무를 담당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문학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했다. (259-260ㅉ)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호족 연합정권이라고 불리는 엉성한 통치방식의 약점이 거듭 노출되었다. 그러다가 제4대 광종이 들어서가 호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시책을 계속해서 폈다... 956년(광종 7)에는 노비를 다수 양민으로 되돌리도록 해서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기반을 튼튼하게(노비 안건법?)... 958년에는 과거제를 실시... 960년에는 백관을 공복을 제정하고 수도 개경을 황도라고 일컬었다... 과거제로 인재를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것은 신라때 육두품이 간절하게 바라던 바. 신라의 독서삼품과는 불완전한 제도. 고려가 신라를 아우르자 골품제는 쳘폐되고, 과거제 실시가 필연적인 추세로 등장했다. 과거제 실시의 직접적인 동기는 지방 할거 호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정부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자기 주변의 인재를 얻자는 데 있었다.... 많은 난관과 반대를 무릅쓰고 광종이 결단을 내려 과거제를 실시하자 고려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과거제는 천인이 아닌 양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능력시험을 거쳐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중국에서는 589년부터, 한국에서는 958년부터, 월남은 1075년부터 과거제를 실시해 동아시아 중세문명이 다른 곳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데 동참하지 않은 일본은 신분에 따라 관직을 담당하는 낡은 관심을 유지해, 문명권 주변부의 낙후한 모습을 오랫동안 지녔다... 5품 이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면 자기 자식을 과거에 거치지 않고서도 진출시킬 수 있는 음서제가 고려 때 마련되어 조선시대까지 지속. 그러나 과거 급제자라야 명예를 누리면서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321-322ㅉ)

유럽인들은 뒤늦게 동아시아에서 과거제를 발견하고 근대 고시제도를 만드는 데 활용했다. 일본이 선두에 서서 동아시아 각국이 유럽 고시제도 받아들여 아직까지 실시. 동아시아 중세의 고시제와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 고시제도의 가장 큰 차이는 문학고시와 법학고시라는, 시험과목의 차이다. 문학고시에서는 법학은 하위과목으로 취급해 행정실무 담당하는 하급급제자 뽑는 데 이용. 법학고시 쪽에서는 문학은 소용 없다 여겨 아주 배제. 동아시아 중세인은 사람을 알아야 나라를 달스리는데, 사람을 아는 일은 문학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문학은 삶의 변두리에 있는 장식물이 아니고 사람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값지다고 하는 중세인 공통의 생각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내 제도화했다. 법에 따른 실무활동 상위에 가치관을 정립하고 정신을 개발해 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문학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과거제를 문학고시로 만들었다. 실정법 위에 자연법, 실정법 전문가를 자연법에 관해 최상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학인니 지도해야 바람직한 사회가 이뤄진다 했다.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한 공상을, 철학자를문학인으로 바꿔 실현했다. 과거제에서 필요로 하는 문학은 민족어문학이 아닌 공동문어문학. 문명권 전체에 통용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문화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 (322-323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