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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음

수상록 :: ~ 2013.4.7


2013.4.7

내 가슴이 살짝 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전 읽기의 설렘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장 낯선 이들과 지금 이곳의 나 사이에 소통가능성이라는 다리가 놓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대화 가능함이야말로 사람 사이에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 아닐까?




3.30

"말을 건넬 수 없음이 많은 우정들을 해체시켰다." 
누구나 알고, 늘 잊고, 너무 늦게 떠올리는 진실. 영어본에는 그저 'out of sight, out of mind.'




3.24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종려주일, 뜻밖에도 목사님이 권력을 버리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권력을 얻어서 뭔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얼핏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로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날 수 없으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권력포기선언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가 권력을 통해 해방을 가져올 것을 기대했던 군중들과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갔듯이. 

(설교 중에 지금 당장 권력포기선언을 하라고 다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니 정치나 현실에 관심 갖지 말고 교회와 천국만 바라보라는 말은 더더군다나 아니셨습니다.) 

우리 정치를 비유로 언급하시긴 했지만 꼭 정치에 대한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에 대해서든 직장에서든 일상의 삶에서 내가 가진 권력을 통해, 더 많은 권력을 요구함으로써 무언가 해결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삶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살며 섬기며 새로운 세상을 지금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보지도 않은 주제에 권력만 얻으면 그런 세상을 만들 거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것도 목사님 말씀과 아주 비슷합니다. 말씀 들으며 통쾌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은, 늘 그렇듯, 제 맘대로 이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들이 행사하고 있는 권력을 뺏어오면 그걸 좋은 일에 쓸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그러니까 내게 그 권력을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의 방식대로 만들어지고 그들의 방식대로 사용되도록 구조화 되어 있습니다. 권력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사람 죽이는 검을 빼앗아 꽃을 가꾸겠다면 잘 될까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은 저들의 권력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은 제도 정치 바깥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정치의 힘이 배태되도록 하지 못하면 변화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은 (지금 작동하고 있는) 권력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는 포기선언(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해체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대신 사람들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며 일하며 그물처럼 엮여가는 가운데 거기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정치의 힘(=권력)을 만들어 변화의 힘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누가 그걸 해야 한다는 당위의 말씀이 아니라, 결국 정치의 변화란 정치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공적 소통 행위들 속에서 전혀 다른 힘을 만들어내고 그걸 주류화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아... 정말 머나먼 길이겠네요.^^

구체적인 이야기를 생략한 이런 짧은 정리가 얼마나 이해될지 모르겠네요. 간단하게라도 써놓지 않으면 날아가버릴 것 같아 우선 기록해둡니다.


함정은...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 새로운 정치의 잠재적 주역들조차 (현실 정치나 선거 앞에서는) 대체로 일단 권력부터 뺏는 게 옳다고 믿는다는 점. 자기가 뭘 하겠다는 건지 조금도 입증하지 못하고 자신도 그게 뭔지 모르는 채.
위 본문의 생각은 말로서는 그럴 듯 해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엔 지지자가 별로 없어 순진한 공상가들의 생각으로 치부됨. 끈질긴 촉매 활동으로 그런 변화의 속에 있음을 체감하는 사람들을 엮어가는 수밖에. 
그나저나 권력의 획득과 향유가 아니라 진짜 변화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점점 드물어지는 건 아닌지...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과 이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같을 순 없을 겁니다. 우리가 쓸 수 없는 권력이 아닌 새로운 힘을 만드는 일에서는 저 또한 실패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작은 권력으로 무언가 해보려고 한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3.21

새벽 비행기로 돌아와 쪽잠 자고 급한 일 처리하고 서울로 강의 다녀와서 식구들과 저녁 먹고 치우고... 이번 여행을 같이 준비한 아우들에게 잘 다녀왔다고, 몇 마디 보고와 소감의 메일을 적어 보내는데 문득 콧날이 시큰하다. 
씩씩하게 잘 걸으시고 여행을 즐기시니 마음이 놓이고, 평소 잘 느끼기 힘들었던 두 분 정다우신 모습에 고맙고, 세월에 따라 더 너그럽고 따뜻해지시고 젊으실 적에 보여주셨던대로 여전히 호기심과 열의에 끌리시는 모습에,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참 잘 나이들어 가시는구나 싶어 기쁘고 애잔했다. 
자신도 나이들어 가고 있다는 걸 느낄 쯤에야 부모가 다시 보이고, 혈연 때문에 잊고 있던 한 사람의 인격으로 다시 그 삶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 건 아닌지. 
두 분을 위해 늦기 전에 다녀오자고 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또 나를 키우시는 건 아닌지. 젊어서 있는 힘껏 키우고 뒷바라지 하신 것처럼 이제 잘 나이들어 가시는 모습으로.















3.14


2.15

쫓기는 아침, 잠시 멈추고 인간예찬으로 하루를 다시 시작해보자. 
"인간이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을 그에게 기대할 수 있다는 것과 또 매우 불가능한 것을 그가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지금 이 순간, 멈춰, 어제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언제든지 사람들의 뻔한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진 지혜와 용기의 참된 힘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오늘 나는 어제와는 다른 배역을 맡는다. 
삶의 관성이 제아무리 냉혹하더라도, 내 의지로 멈출 수 있고, 고쳐 생각할 수 있고,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사람이다.



2.11

역시 고수들의 생각은 동서양을 넘어 통한다. 그러니 바르지 않은 걸 바르다고 우길 도리가 없다. 아예 눈을 감고 산다면 모를까. 플라톤 국가 1권 (347b~d)




1.24

아무 기획 없는 워크숍을 해보고 싶다. 시간, 장소만 딱 정하고. 음식도 옆에 쌓아두고 먹고 싶을 때 알아서 먹고. 분명히 재밌을 거다. 하지만 아무 기획 없는 워크숍에도 제법 꼼꼼한 생각이 필요하다는 건 함정 아닌 진실. 하여간 아무 기획 없는 워크숍을 잡아보고 싶다. 시간, 장소만 딱 정해두면, 참여할 사람들끼리 이것저것 해보자고 의견 내고 이야기나누고 모임을 만들 거다. 마이크나 노트북 따위 장비도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챙기고 아무도 뭔가를 대신 제공해주지 않는다. 인기 있는 제안도 있을 거고, 사그러드는 제안도 있을 거고. 반짝이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을 거고, 목소리는 높지만 친구가 없는 사람도 있을 거고. 타인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제안할 수 있고, 누구든 초청할 수 있고, 구경꾼이 될 자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는 워크숍. 한번 해볼까? 분명히, 재밌을 거다.



2012.12.25

그저 평범한 진리.




12.2

오랫동안 변함 없는 분들이 떠오른다. 특별날 것 없고 소박한 사람들이지만 옳은 일을 마주하면 '나'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태를 투명하게 인식하며 작은 의욕이라도 내어주는 사람들. 이런 이들의 덕은 재주나 똑똑함이나 찰나의 반짝임으로 얻는 평판으로는 따라갈 길이 없다. 변치 않음의 덕, 나를 잃음의 덕. 작은 체구 안에 빛나는 세월의 굳센 나무.




12.1



11.28

객관적인 지표들이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문재인 후보와 지지자들은 여유롭거나 우왕좌왕 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의 동료들은 강정 해군기지 예산이 상임위에서 통과되는 걸 수수방관한 민주당을 선택에서 배제한단다. 
이긴다는 건 무엇인가? 나도 이기고 싶다.




10.16

장자가 도에 이르는 삶의 모습으로 보여준 것은 살림을 위한 노동, 생계를 위한 노동을 섬기는 일. 장자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은 보기 싫어하고 창공을 나르는 대붕의 호쾌한 자유만을 꿈꾸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는 그런 곳에 있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무당의 신통함에 홀렸던 열자(列子)가 스승 호자(壺子)를 통해 진정한 도가 있음을 알고 배움을 위해 택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 삼 년간 두문불출하고, 아내를 위해 밥도 짓고, 돼지도 사람 대접하듯 먹이고, 세상일에 좋고 싫고를 구별하지도 않"는 삶이었습니다. (7편, 應帝王)
한편 조상(曹商)이 묘사한 장자의 삶은 "이렇게 비좁고 지저분한 골목에서 군색하게 짚신이나 삼고, 버썩 마른 목에 누런 얼굴로 사는 것"이었습니다.(32편 列籞寇)


8.19

결국 마지막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은, 누가 정치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정치해야 할 사람들이 정치할 것인가, 그 앞에서 물러서지 않게 될 것인가, 자신과 이웃의 미래를 포함하는 의사결정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 일은 어떻게 가능해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