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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제1장 소요유(逍遙遊) 1-1, -2, -11 :: 상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변화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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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 第一 逍遙遊 1-1, -2, -11 상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변화의 가능성

[장자] 기세춘, 안동림, 오강남, 이현주 | 인문학서당 모임 | 서형원 | 2012.9.11

 

*번역문은 기세춘의 번역을 기초로 약간 보완했다. 오강남과 이현주의 해설은 권할만하다. 기독교 배경이 있는 독자에게는 특히 이현주 “장자산책”을 참고할 것을 권한다.

 

ㅇ 逍遙遊 :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오강남) 인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노니는 것.(기세춘)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안동림)

ㅇ 소요유 편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와 초월, 이것이 장자 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오)

ㅇ 소요유 편은 장자 전체의 성격을 관통하는 글. 뱁새가 대붕을 비웃은 것은 대붕을 뜻을 알리 없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대붕이 뱁새를 비웃지는 않는다. 대붕을 비웃은 메까치와 비둘기는 同中求同의 전체주의자들. 소요유와 제물론의 의도는 동중구이 이중구동 속에서 구동존이 하기를 요구한 우언이다. 잘난 대붕과 못난 뱁새를 차별하는 것은 속물들의 마음일 뿐 장자의 본뜻이 아니다. 소요유 편은 “차별은 언어의 작란일 뿐 만물은 평등하다.”는 제물론의 서론 격이다.(기)

ㅇ 장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욕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비웃으며 도의 세계, 초월적인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안) 비웃는다거나 참된 행복을 얻는다거나 하는 표현은 동의하기 힘들다. 현실을 초월한 호탕한 자유라는 낭만적 해석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 소요유 편의 역할은 일체의 한계를 걷어치우라는 메시지에 있지 않나 싶다. 상상 가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상상해온 그 어떤 변화 가능성도 사실은 구차한 현실론에 불과하며, 우리 실존은 그 상상의 범위를 넘어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北冥有魚, 其名曰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為鳥, 其名為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하늘못)다. 재해는 뜻이 괴이한 사람(책)이다. 재해의 말(기록)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

 

ㅇ 화(化) : 가장 중요한 글자. 장자의 주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현.(오) 모든 것이 실체는 그대로 있다. 다만 겉모습(容)이, 이름(名)이 바뀔 뿐이다. … 북명과 남명이 같은 바다인데 어째서 물고기가 같은 바다를 옮겨 가지 못하고 몸을 바꾸어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야 하는가? 화(化)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가 화요 역(易)이다. 다른 무엇으로 바뀌지 않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다른 무엇으로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면서 한결같은 바뀜이다. 고정된 신은 우상이다.(이현주)

ㅇ 북명(北溟) : 그윽하고 아득한 곳. 명은 암흑색 큰 물. 창세기 1장 2절 ‘어둠이 덮여 있는 깊은 물’.(이) 북명/남명은 우주의 근원인 암흑 또는 혼돈을 상징. 노자 35장, 창세기 1장.(기)

ㅇ 곤(鯤) : 작은 물고기, 혹은 그 알.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큰 것을 지칭. 즉 장자다움. / 알, 물고기, 붕새는 모두 동일한 것.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오) 서로 다르면서 둘이 아니요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니다.(異而不二 不二非一) 공과 색, 말씀과 육신, 무명과 유명.(이)

ㅇ 붕(鵬) :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 그 비상은 이런 변화나 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 인간은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오)

ㅇ 우주에는 단절이 없다. 머리카락 만큼한 틈도 없다. 바다는 하늘의 다른 모습이다.(이)

ㅇ 자연 안에서, 그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생래적 가능성의 발현.(오)

ㅇ 새로 하여금 날게 하는 것은 날개인가, 바람인가, 그것을 바라보는 너의 마음인가?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릴 때 우주가 함께 흔들리고 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질 때 하나님이 함께 떨어진다. 새는 결코 저 혼자서 날 수 없다.(이)

ㅇ ‘나’(己)라고 하는 물건 하나를 없애버리면 너 있는 자리가 곧 새 하늘 새 땅이요 네가 곧 곤이요 붕이요 남명이요 북명이요 구만리 창공이요 회오리바람이라는 얘기다.(이)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其遠而無所至極邪?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為之舟;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掊風;背負青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안개와 먼지는 생물이 생기를 서로 불어주는 것이다. 천지가 푸른 것은 바로 생기의 색이며, 그것은 원대하고 끝이 없는 지극한 것이다. 대붕이 내려다보는 것은 역시 아마 안개, 먼지 등 생기였던 것이다. ([저 아래 땅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티끌이 날고,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 주고, 하늘은 푸른데, 그것이 하늘의 본래 색깔입니까? 끝없이 멀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붕새가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까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오)) 또한 물이 쌓여 두껍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당 웅덩이에 술잔의 물을 부으면 겨자씨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 술잔을 띄우면 붙어버릴 것이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기가 쌓여 두껍지 않으면 대붕도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리의 바람이 발아래에 있어야만 바람을 탈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막힘이 없어야만 장차 날아갈 수 있다.

 

ㅇ 큰 날개를 띄우는 “바람” : 생기. 희랍어 ‘프뉴마’, 히브리어 ‘루악’, 산스크리트어 ‘아트만’, ‘프라나’, 한문의 ‘기’(氣). 창세기의 신령한 바람,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불어넣은 생명의 기운. 장자는 바람을 특히 중요시 여긴다. 생기에 찬 사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유인, 건조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현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오) 큰 날개를 실어 띄울 바람이 있어야 날 수 있다. 그러므로 붕은 무기(無己)다. 무기니까 무공(無功)이요 무공이므로 무명(無名)이다.(이)

※ 구만리 쌓인 바람과 생물들이 서로 불어대는 생기는 같은 것. 천지는 그 생명의 빛깔로 가득 차 있고 천지만물이 모두, 대붕조차도 그 생기 속에서, 그 생기에 의존해서만 노닌다. (의존한다는 말에는 생각할 여지가 있음.)

ㅇ 매미와 붕 : 장자가 말하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인간의 감각과 지각이 가 닿을 수 없는 영역, 그러나 육문을 지닌 인간 존재와 별개의 존재가 아닌 영역에 대하여... 우언(寓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역은 사량분별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뛰어들 때 문득 자기가 그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자리다... 마침내 질의 차이로 되어버린 양의 차이다.(이)

ㅇ 오해하지 말 것! 장자의 의도는 안팎의 구분을 바르게 짓는 일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되 아울러 모든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 서라는 것, 구분짓되 구분에 초연하라는 것. 초연일방으로는 아직 ‘섰다’고 할 수 없다. 세상에 살면서 허둥지둥하지 않는 것으로는 아직 모자란다. 때로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세속의 티끌 속에 달리되 거기에 물들지 않는 사람, 마음을 거울처럼 쓰는 사람, 그 사람을 가리켜 홀로 우뚝 선 지인(至人)이요 신인(神人)이요 성인이라 한다.(이)

※ 온갖 생명의 기운, 즉 안개와 티끌이 얽혀 있는 그 속에 존재하되 그 안의 자잘한 구분을 횡단하라, 뛰어넘으라.

 

 

惠子謂莊子曰:「吾有大樹, 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捲曲而不中規矩, 立之塗, 匠者不顧. 今子之言, 大而無用, 衆所同去也. 」

莊子曰:「子獨不見狸狌乎?卑身而伏, 以候敖者;東西跳梁, 不避高下;中於機辟, 死於罔罟. 今夫斄牛, 其大若垂天之雲. 此能為大矣, 而不能執鼠. 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鄉, 廣莫之野, 彷徨乎無為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無害者, 無所可用, 安所困苦哉!」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가죽나무라 말하네. 크기만 했지 옹이가 박혀 목수의 먹줄에 맞지 않고 가지는 굽어 곱자와 그림쇠에 맞지도 않네. 그래서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들조차 돌아보지도 않는다네. 자네의 말은 이 나무처럼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으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라네.” 장자가 답했다. “자네는 언젠가 족제비를 본 적이 있겠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망을 보는 거만한 놈이네. 동서로 날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지만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려 죽게 마련이네. 저 검은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서 구름이 내린 것 같으니 이야말로 크다고 하겠으나 쥐를 잡을 수도 없네. 그러니 자네의 나무가 크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어떤 인위도 없는 고장의 광막한 들에 심고 그 곁을 할 일 없이 노닐고 그 밑에 누워보기도 하면 어떻겠나? 도끼로 찍힐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이니 쓸모없다고 어찌 괴로워한단 말인가?”

 

ㅇ 혜자 : 위나라 재상. 본명은 혜시(惠施). 이론학파의 대가, 명가(名家)의 유명한 논객.

ㅇ 혜자 대 장자 : 본질론적 견해 대 비본질론적 견해(=시각주의적 접근 perspectival approach). 우리 머릿속의 쓸모가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야.(오) 혜자의 자기중심 판단 대 장자의 사물중심 판단. 자신의 용도라는 견지에서 박을 보는 혜자와 박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장자. 쓸모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쓸모를 찾아내는 것. ‘나’ 없는 ‘나’가 사물을 보는 방법.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성서 시편 118:22,23) 도대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는 없으신 하나님. “이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잘 사람을 구하여 그런 까닭에 버리는 일이 없고 언제나 잘 물건을 구하여 그런 까닭에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다.(노자) 성인에게는 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세상에 따로 이것이 성스런 물건이라고 구별할 대상이 없다. 모두가 부처다.(이)

ㅇ 장자의 눈에 자연은 인간의 쓸모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더불어 노닐 대상이자 보살펴야 할 이웃이며 받들어 모실 어미다. 만물이 제 몸과 하나임을 깨달은 자의 눈에는 온 세상이 대자대비의 대상일 뿐. 모든 중생이 고해에 빠져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쓸모라는 말을 굳이 하고 싶다면 우리 이웃으로 어미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용지용이요 대용(大用)이다.(이)

ㅇ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장자가 그린 이상향. 인위로 건설된 도시가 있기 전 자연으로 이루어진 시골. 도시에 의해 끊임없지 짓밟히면서도 마침내 도시를 구원할 거룩한 어머님.(이)

 

※ 이 이야기는 사람의 쓸모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의 논객이자 재상인 혜자 정도의 사람도 장자의 쓸모는 가늠할 수 없다. 우리 각자의 쓸모는 무엇인가?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쓸모에 부응하고자 표주박처럼, 사냥개처럼 안달하고 있진 않은가? 그것이 정말 쓸모 있는 일일까? 여론, 혹은 민심, 혹은 이른 바 시대가 요구한다는 쓸모에 부응하는 일은 정말 쓸모 있는 일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지는 요구에 떠밀리고 안달하는 일, 내 쓸모를 입증하고자 하는 일로는 참된 쓸모에 이를 수 없다. 쓰는 이가 아닌 박과 나무에게서 쓸모를 찾아내듯, 요구하는 사람이나 시대가 아니라 내 자신으로부터 참된 쓸모를 찾아낼 때, 그것이 진짜 쓸모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봐야 이 이야기를 읽는 일이 쓸모 있다.

 

※ 당장 나무를 잘라 쓰고자 하는 이의 쓸모에 부응하고자 하면 잘려 쓰러져야 한다. 쓸모없는 나무가 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처세론으로는 제발 받아들이지 말자. 남이 바라는 쓸모, 주어진 쓸모에 부응하는 삶이 진짜 쓸모 있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해보자. 진짜 나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당장 소모되어 목재로 쓰일 수도 있지만, 거대하게 자라나 그 아래 많은 생명이 노닐도록 품어, 수많은 생명의 더불어 삶을 실현할 수도 있다. 쓸모(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쓴다면)는 어떤 필요에 부응한다는 말이므로, 독야청청 하라거나, 홀로 행복하라는 말이 될 수는 없다. 부응한다는 말의 긍정성, 안달하고 입증하고자 한다는 말의 부정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참된 필요에 부응하는 참된 쓸모는, 나 자신의 비약, 실현, 자유, 나아가 나와 만물의 일체화로부터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신인이 다스리지 않으면서 만물을 자라게 한다는 것은 이런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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