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에와 라인강 서형원 (과천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갑자기 낼모레 독일 출장을 다녀오라고?’ 환경운동연합 이상훈 팀장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중간고사 과제물을 마무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던 10월 29일, 금요일이었다. 독일 본에서 기후변화협약 제 5차 총회가 열리고 있는데 마땅히 갈 사람이 없으니 서형원 씨가 좀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올해 환경연합 일을 잠시 접고 환경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어쨌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숙제는 다녀와서 내겠다고 말씀드리고, 왕복 항공표와 마누라 신용카드만 믿고 출발하는 수밖에 …. 아직 어두컴컴할 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본으로 가기 위해 잡아탄 열차는, 타고 나서야 알았지만, 독일의 고속전철 이체에(ICE)였다. 우리나라에 고속전철 들여올 때 프랑스의 떼제베와 경쟁했던 그 열차다. 아마 “도시간 특급”이라는 뜻인가 보다. 비행기 삯을 아끼려고 홍콩을 경유하는 긴 여행을 하다 보니 일도 시작하기 전에 몸이 몹시 피곤했다. 다행히 이체에는 쉴 만 했다. 순식간에 뒤쳐지는 나무들을 유심히 볼 때나 엄청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을까, 조용하고 흔들림도 없었다. 그 유명한 라인강을 막상 가서보면 실망한다고, 누군가 그랬다. 이번 여행은 준비가 부족한 채로 간 출장인지라 관광을 위해 짬을 낸다든지 하는 일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지만, 이체에를 타고 여행한 두 시간이 못되는 시간은 이 빡빡한 여행자에게도 좋은 휴식과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라인강을 따라 철도여행을 하면 독일 관광은 거반 한 셈이라고도 한다. 라인강에서 눈에 띈 것들. 지붕 꼭대기의 각이 좁고 보통 흰색 회칠을 한 벽과 빠끔히 나있는 창문 몇 개가 전면에 보이는, 멀리서 보면 성냥갑 세워놓은 것 같은 북유럽식 집들. 집들은 올해 유난히 곱게 물들었다는 단풍 속에 점점이 박혀 있다. 강이 돌아 흐르는 언덕이면 제일 높은 곳에 삐죽 서 있는 크고 작은 성들. 어릴 적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 등교 길을 지키고 서있던 미류나무도 라인강을 따라 줄지어 등장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강 아래위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화물선들 - 아직 여객선이 나오긴 이른가 보다. 독일의 상업중심지 프랑크푸르트와 공업지역인 쾰른을 잇는 구간에서도 라인강은 참 자유로웠다. 강 주변에 도시나 마을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콘크리트로 덮은 강둑이나 강 허리를 자르는 인공 구조물은 볼 수가 없었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는 고성을 오랜 세월의 벗으로 삼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흐르고 있다네’ 하고 라인강이 말하는 것 같았다. 독일에서 라인강을 대신할 수 있는 물류 수단은 없다고 한다. 경제적 가치도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라인강은 그 모습 그대로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굽은 것을 펴서 더 벌어들이겠다는 사람이 정말 없었을까 궁금하다. 새벽이라 다소 몽롱한 기분으로 라인강을 따라 달리다보니, 세월을 거슬러 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자연 그대로의 강만이 아니라 그 길에 늘어서 있는 마을의 집들도 온통 고풍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좀 자세히 살펴보니 빌딩과 도로 같은 현대식 인공물들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강을 따라 늘어선 도시와 마을에서 단연 눈에 띄고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옛것들이었다. 새것들은 마치, 풍상을 이겨온 선배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무엇이든 새것이 제일 좋은 자리, 가장 화려한 빛깔을 차지하고, 일대의 스카이라인까지 확 바꿔놓는 그런 일이 아주 당연하기야 하겠는가? 한국의 경부고속전철 생각이 나서 잠깐 답답했다. 황당무계한 부실공사와 끝없이 올라가는 공사비 얘기가 아니다. 경부고속전철은 서울과 부산을 더 빠르게 다니는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체에가 여행자에게 주는 편안함과 휴식, 그 나라의 아름다움은 기대하지 못할 것 같다. 서울 부산을 지나는 총 1시간 51분 중 64 %를 터널 벽면이나 방음벽만을 쳐다보며 여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문을 뚫기는 뚫으려나? 아마 비슷한 거리에 해당될 프랑크푸르트와 본 사이를 내가 그런 식으로 여행했다면 피곤함은 더했을 것이 분명하고 일을 앞두고 자신감을 찾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며 독일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나라라고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특급열차를 타느라 낸 돈이 무척 아까워 속이 상하지 않았을까? 본에서의 일은 무사히 마쳤다. 돌아가는 길에 왔던 길을 되짚어 여행했다. 이체에보다 한 등급 싼 열차(이체 : IC)가 같은 구간을 다니는 건 그때야 알았다. 이번엔 무엇보다 열차 안의 독일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인강을 비롯해 자기네 자연환경을 위해 그들은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인들의 옷차림이나 생활은 소문 그대로 참 검소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그렇게 검소하게 살고 환경을 애지중지한다고 해도, 지구 생태계의 입장에서는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전세계 사람들이 독일인들 수준으로 먹고살려면 지구가 네 개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외형은 검소해도 실제 소비 수준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작년에 내가 주관한 국제회의에 참가한 발표자 중에 젊은 독일 친구가 있었다. 한국이 독일보다 덜 발전한 나라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다. 나는 독일에서 옛것을 보았는데 그 이는 아마 서울에서 초현대를 보았을 것이다. 생활 수준은 어떻든 외형을 쌓아올리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허장성세를 위해 우리도 벌써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소비하고 있다. 이체에와 라인강의 호사는 누리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과천환경운동연합 소식지 (20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