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고와 출판::

김 대리의 반나절 (99.12)

김 대리의 반나절

아무리 옳은 얘기라도 제일 듣기 싫은 게 뭐 하지 말라는 소립니다. 저도 딱 그렇습니다. 뭐 하자는 소리에는 귀가 솔깃해도 하지 말라는 얘기는 꼭 뒤집어 생각해 봐야 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환경 실천에 대해 뭘 이야기하라고 하면 참 힘듭니다. 순전히 하지 말라는 얘기밖에 없거든요. 남 얘기를 하면 좀 편할까 해서 대기업 S사에 다니는 김 대리 얘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김 대리는 오늘도 물론 늦잠입니다. 반쯤 먹다만 밥그릇을 팽개치고 양말을 꿰어 신으며 김 대리는 자동차 리모콘부터 누릅니다. 경쾌한 엔진음을 내고 있을 차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군요. 구두를 구겨 신고 뛰어 나오다가 아파트 1층 현관을 지나는 순간, 김 대리는 깜빡 놓고 온 디스켓이 생각나서 다시 집에 들러야 했습니다. 시동이 걸린 후 운전대를 잡을 때까지 대략 10분, 공회전하는 차는 달리는 차보다 더 지독한 매연을 뿜는다는 걸 김 대리가 알 리 없습니다. 덕분에 버스 정거장까지 걸어가던 아랫집 처녀는 상쾌하던 기분을 망쳤습니다. 이것도 물론 김 대리야 모르는 일입니다.

주차를 하고 1층 현관으로 김 대리가 뛰어들어오는 시간은 어김없이 1분전, 막 닫히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밀어 넣고 쑥스러운 마음에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무사히 정시 출근을 기록한 김 대리의 하루는 향긋한 커피로 시작됩니다. 부서원들이 함께 쓰는 유리컵도 있지만 아직 씻겨 있질 않군요. 오늘 김 대리가 버리는 첫 번째 종이컵입니다.

어제 집에서 마무리한 일곱 쪽 짜리 보고서를 출력할 차례입니다. 자신 있게 ‘엔터’. 그런데 공용 프린터가 끊임없이 종이를 뽑아댑니다. 아뿔싸, 누군가가 프린트 설정을 열부로 해 놓았습니다. 마지막 오타가 중요한 제목에서 발견된다는 건 ‘철의 법칙’, 새 종이 일흔 장이 몽땅 이면지 통으로 들어갑니다.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오면 꼭 양치질을 합니다. 자기 몸은 제법 깨끗하게 가꾸는 김 대리입니다. 양치질하는 내내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선 에너지와 화학물질을 들여 정화한 수돗물이 하수구로 직행합니다. 뒷주머니에 꽂은 손수건은 깔끔한 남성의 자부심입니다만…, 손을 닦는 데 쓸 물건은 아닙니다. 일회용 종이 수건 서너 장을 뽑아 닦습니다.

일찍 자리에 돌아오니, 모두들 켜 놓고 나간 컴퓨터 십여 대가 자기들끼리 웅웅거리고 있습니다. 밖은 제법 추웠는데 난방을 하는 사무실엔 햇볕까지 제법입니다. 덥고 나른 한 기분을 바꿔보려고, 김 대리는 창문을 열고 오후 일을 시작합니다.

김 대리의 반나절에는 숨어 있는 숫자들이 많습니다. 비슷한 거리를 출근한다면 김 대리가 소비한 에너지는 아랫집 처녀의 약 15배가 됩니다. 광화학 스모그와 산성비를 일으키는 질소산화물은 자가용이 버스의 1.51배, 도로를 차지하는 면적은 10배가 되지요. 김 대리가 10분간 공회전 할 때 소비한 연료는 대략 3.5km를 뛸 수 있는 분량, 오염물질은 달릴 때보다 여섯 배쯤 많이 나옵니다. ‘김 대리, 몹시 추울 때도 공회전은 2분이면 충분합니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격층 운행을 하면 절약할 수 있는 금액은 우리나라에서 연간 164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일년 간 버려지는 종이컵은 연간 1백26억 개, 무제로 따지면 2만5천 톤에 이릅니다. 종이컵이든 프린트 용지든, 종이 1톤을 생산하려면 나무 7만 그루가 필요하고 그만큼을 아끼면 석유 1,500 리터가 절약된다고 하는군요. 커피 얘기도 잠깐 할까요. 우리가 숨쉬는 산소의 40%가 아마존 밀림에서 만들어진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 그렇지만 아마존 밀림이 커피 농장을 만들기 위해 파헤쳐지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죠.

김 대리가 수돗물을 틀고 양치질을 하는 덕에 낭비한 물은 약 4.8 리터, 모든 사람들이 김 대리를 따라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일년간 1억4천만 톤의 물을 더 써야 하는군요. 한국인 한명의 하루 물 사용량은 409 리터입니다. 일본은 393 리터, 영국 337, 독일 233, 프랑스 296 …. ‘김 대리! 왜 동강에 댐을 짓느냐고 목소리만 높일 일이 아닙니다.’

사용하지 않을 때 전기제품에서 낭비되는 대기전력이 우리나라에서 연간 약 5,000 기가와트·시(GWh), 금액으로는 무려 3천억 원이 되는군요. 불필요할 때 컴퓨터, 복사기, 프린터를 끄면 서울 시청사 한 곳에서만 연간 2천9백만 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와 있습니다. 햇볕이 들어오는 한낮의 김 대리 사무실 온도는 대략 25도, 겨울철 적정 실내온도인 18~20℃에 비해 상당히 높습니다. 난방 온도를 1도만 줄이면 전력소비의 7%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바빠서 절약이나 환경, 혹은 이웃 따위는 돌아볼 틈이 없는 김 대리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김 대리 같은 사람 때문에 아침을 망치는 아랫집 처녀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충고를 하면 김 대리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바뀔까요? 컵을 써서 이를 닦으면 일년에 얼마, 공회전 안 하면 일년에 얼마를 아낄 수 있다고 하면 될까요? 술자리 때마다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는 배포 큰 김 대리인데, 그런 얘기엔 코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말이야, 김 대리! 깨끗한 물이 없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매일 2,500명이라는데 미안하지 않아? 자네 자동차에서 나오는 환경 호르몬인가 뭔가가 아랫집 처녀를 거쳐 나중에 그 아이들 몸에 쌓인다는데 공회전은 좀 자제하지 그래?’

SK주식회사 사외보 <SK> 2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