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블로그04.12.26]<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성과 속, 그리고 자유의 문제
까라마조프란 온갖 속된 욕망의 포로이면서 그 내면은 성과 속 사이의 갈등으로 격렬한 모험을 경험하는 인간 운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그의 네 아들에게 흐르는 까라마조프의 피는 어느 정도 우리 혈관에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루셴까는 미쨔에게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자신의 파멸로 이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속된 욕망을 불러 일으키면서 동시에 비천하고 냉소적이었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는, 삶의 성스런 고양을 향한 욕망을 폭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로서는 그 두 극단의 열망을 향한 모험이 결국 종이 한장 차이, 아니 전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왜 그 두가지는 통하는지, 과연 그런지 하는 점을 좀 더 탐구하고 싶다. 분명한 것이 한가지 쯤은 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깨우는 것, 그러한 열망이 개미집단과 같은 세상의 관행과 부닥칠 때, 그 열망은 모험이 되며 추악한 전락으로도 성스런 승화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 전락과 승화는 외견상 같아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적당한 반듯함과 예절과 품위와 거짓 동의와 존중이라는 표피로 자신의 부자유와 냉소와 동물적 욕망을 숨기고 살아갈 뿐인, 그러한 운명을 거부하는 일...
이 소설의 기독교관은 사실 인간에 대한 하나의 심오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흠... 이 주제는 매우 두려운 문제이다. 예전에 읽은 한 가톨릭 신부의 책 - [용서와 상처]라는 제목이었던가? - 도 같은 주제를 다뤘는데, 기독교의 본질은 고독 속에서 얻어지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구... 이건 굉장히 복잡하다. 이반의 대서사시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으로 대중을 '지도'하길 거부하고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통한 믿음이라는 길을 줬을 때, 빵을 주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의 상을 분명히 했을 때, 그 때 말이다.
종교의 본질, 이라기보다 사실은 인간 삶이 추구하는 바는 질서와 순종, 자선 따위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세찬 열망으로 자신의 삶을 고양하는 일이라는 것, 그러한 길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것을 포함하여... 에구... 온갖 불행한 세상사에 둘러싸인 나는 연민을 제약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고,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더 만족스럽게 느끼도록 하는 일 정도이며,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돕고, 초라하지 않을 정도로 누리고, 미움받지 않을 정도로 배려하는 삶이 불가피하다고, 점점 기울어 온 사람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루셴까!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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