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와 출판::

[칼럼]신뢰받지 못하는 정치, 풀뿌리 지방자치부터 살려야 (과천문화신문 08.11)

서형원 2010. 2. 10. 21:15
오늘 과천문화신문에 넘긴 원곤데, 제목이 영 맘에 안 드네요...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 풀뿌리 지방자치부터 살려야

바깥에 불려 다니는 일이 좀 많아졌습니다. 지방자치 개혁, 생활정치, 주민참여에 관련한 토론회나 강의들입니다. 지방자치와 관련한 행사를 여는 사람들이 현역 지방의원의 이야기를 듣고자 할 때 아무래도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의원의 생각과 활동을 듣고 싶나 봅니다. 지난 지방선거부터 기초의회에도 정당공천제가 실시되면서 정당에 속하지 않은 의원이 전국적으로 거의 사라진 탓에 저 같은 사람들이 바빠진 셈입니다. 오늘은 이런 강의에서 제가 주로 하는 이야기를 짧게 전해봅니다.

주민의 입장에서 시의원이란 무엇일까? 시의원에겐 별 권한이 없다는 말도 합니다. 제일 중요한 예산에 관해선, 사업을 위해 예산을 세울 권한, 즉 편성권은 시장에게 있고 의원들에겐 삭감할 권한만 주어져 있습니다. 시의 법령인 조례를 제정할 권한이 의회에 있지만, 조례 규정은 해야 한다는 것보다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실제 효과는 단체장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상시에 자료를 요구하고 사업을 감사하고 조사할 권한도 의회에 주어져 있습니다만 이 역시 단체장이 하는 일을 따지는 역할이지 스스로 뭔가 만드는 역할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시의원에겐 아름다운 일을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은 별로 없고, 자르고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하며 따지는 역할만 주어져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의원 입장에선 이미지에 좋지 않은 일일지 몰라도, 우리 지방자치제도는 시장과 의회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라는 취지에서 양 기관을 분립하는 제도를 택하고 있습니다.

누군들 비판하고 잘라내는 일이 기분 좋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방의원이 예산을 감시하고 삭감하는 역할보다 자기 하고 싶은 예산을 따내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지역구에, 혹은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들을 위해 예산을 만들려면 자기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집행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낭비되는 예산, 선심성 예산, 불공평한 예산, 비효율적인 예산을 골라내어 도려내야하는 의원의 칼은 무뎌지기 쉬울 겁니다.

물론 예산의 바람직한 용도를 집행부에 제안하고 실현되도록 하는 일은 의원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작은 예산을 들여 주민들이 더 행복할 수 있는 사업이 있거나, 행정의 눈에 띄지 않아 소외되어 있는 주민이 있다면, 또는 예산 집행이 공평치 않아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민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다면 의원들도 얼마든지 예산의 편성과 집행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감시와 견제라는 자기의 위치는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비닐하우스 마을에 갔더니 고장 난 연탄보일러를 고치지 못하고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 분도 계시고, 휠체어 타이어에 구멍이 나서 두 달째 거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시의원들은 아무래도 주민들 가까운 곳에서 함께 호흡해야 하는 위치니까, 한사람 한사람의 어려움을 더 빨리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합니다. (휠체어 건은 두 달 만에야 알게 되어 무척 부끄러웠지요. 편하고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지 않으니까 연락도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방자치에 관한 강의를 할 때 기초의원이야말로 지방자치를 살아 있게 하는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지방자치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엄격하고 칼날 같은 견제의 역할은 주민의 입장에선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기초의원이 바로 정치의 꽃이라고, 좀 지나치게 말하기도 합니다. 시의원이야말로 주민들과 눈을 맞추고 함께 호흡하는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주민들과 함께 한다는 정치의 소박하지만 진정한 면모가 기초의원의 활동에는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참 모습이 살아나야 정치는 분노의 대상이 아닌 국민의 소중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지방자치라는 풀뿌리에서도 잔 풀뿌리의 역할을 하는 기초의원이야말로 정치라는 나무에 영양분, 즉 주민의 처지와 의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저는 기초의원 선거에 정당공천제가 도입되면서 시의원의 역할이 왜곡되고 있고 이 때문에 지방자치가 더 나빠지고 있다고, 주민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뿌리가 땅 속의 영양분을 찾아다닐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위의 굵은 뿌리나 줄기의 눈치를 본다면 나무가 어찌 되겠습니까? 대구의 한 기초의원이 국회의원 부인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더라는 최근의 기사는 지방자치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는 전국적 현상의 일각일 뿐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좋은 정당이 필요하다고 믿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입니다만, 풀뿌리 지방자치만은 정당이 아닌 주민의 손에 맡겨져야 주민도 행복하고 정치도 건전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대한 실망이 하늘을 찌르는 요즘입니다. 나라정치를 바라보는 격한 마음을 내 생활의 정치, 동네의 정치를 더 낫게 만들 우리 지역의 긍정적 에너지로 돌리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http://ecopol.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