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와 출판::

첫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하나뿐인 지구'

서형원 2010. 2. 10. 21:00
첫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하나뿐인 지구’


L 선배, 참 오랜만입니다.
하나뿐인 지구의 관악산 기슭에서 전 지금 새벽을 맞고 있습니다. 아직 창 밖은 어둑하고 관악산도 어렴풋한 덩어리뿐입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제법 상쾌한 바람이 스며드는군요. 며칠 전엔 이 글을 쓸 생각으로 L 선배가 만든 ‘하나뿐인 지구’를 보았습니다. 벌써 000회라니, 참 만만치 않은 연륜이 되었더군요.
‘하나지구’-이런 애칭을 쓰더군요-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5년 전이 생각납니다. 하나지구를 한번 본 적도 없던 제게 하나지구 팀과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지요. 처음 환경단체에 들어와 한창 신이 나 있을 때였는데, 하나지구에서 저희 단체 활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녹화된 것을 보고서야 알았지만, 신출내기 환경운동가였던 제가 TV에서 한 말은 그저 “젊기 때문에 뭐든 할 수 있다”는 막무가내 자신감 밖에 없었더군요.
그 동안 차곡차곡 연륜을 쌓은 하나지구처럼, 제가 지금도 그때의 자리에 있다는 걸 생각하니 한편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L 선배, 어떠세요? 하나지구는 여전히 젊고 패기만만 한가요?
얼마 전부터 후배 격이 되는 환경 프로그램도 여럿 생겼더군요. 이제 하나뿐인 환경 프로그램은 아닌 셈이네요. 누구보다 먼저 쉼 없이 환경현장을 누벼온 선배 환경 프로그램으로서, 하나지구가 앞으로 어떤 연륜을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L 선배.
두 달 후면 제 첫아이가 태어난답니다. 이렇게 설레는 일인지는 몰랐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름까지 정해놓고 나니 요즘은 벌써 아이와 함께 지내는 느낌입니다. 장차 이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환경에 관해 말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을까 되새겨 보기도 하고 그 이야기들이 내 첫아이에게도 들려줄 만 할까 견주어 보기도 합니다.
공기가 오염돼 사람들이 병든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생태계가 바다에 잠긴다, 농약이 무서워서 합성세제로 먹을거리를 씻는다, 우리는 쓰레기에 파묻혀 못살고 아이들은 자원이 없어 못산다, 반달곰은 정력제가 되고 수달은 박제가 됐다더라, 핵발전소 마을에선 기형 송아지가 송전탑 마을에선 백혈병 어린이가 생긴다더라…. 하나지구나 제가 늘 하는 이야기들이지요.
현실이 끔찍하긴 합니다. 그걸 눈감을 수야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사람들은 굶고 있는데 상상도 못할 물자와 돈이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쓰이고, 결국 지금 사람들과 그곳의 환경을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몰아 넣는데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페르시아 만인가 하는 곳에서 일어난 전쟁은 벌써 잊혀지고 있지만, 화학물질을 쏘인 군인의 병든 아이들이 아직도 태어나고 있고 오염된 바다와 땅은 앞으로도 몇 백년이 갈 거랍니다.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무서운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을까? 해준다한들 그게 아이에게 무슨 다짐이 되고 희망이 될까? 요즘 제 걱정거리입니다.

L 선배,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어떨까요?
남태평양이라는 먼바다에 나지막한 섬이 있어서 그곳 해변엔 거북이가 기어다니고 나무 위엔 원숭이도 살며, 마을엔 너처럼 착한 사람들도 제법 많이 살고 있다고, 우리가 이들을 잘 모르고 지내는 동안 무심코 석유와 석탄을 마구 쓰고 자동차를 함부로 굴리며 나무도 아까운 줄 모르고 베어냈다고, 이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가 함부로 굴 때마다 바닷물이 올라가고 폭풍이 섬을 덮쳐 그들이 아주 위태롭게 됐다고, 이제 우리가 그 섬에 사는 거북이와 원숭이,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게되고 또 친구로 여기게 돼서 석유도 석탄도 나무도 자동차도 조심해서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나뿐인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약속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해야 한다고 환경단체나 TV에서 권하는 일들은 참 많지만, 그 지구가 정겨운 친구들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지 못 한다면 어떤 일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하나지구를 통해 낯선 것들과 접하는 기회를 갖지요. 지리산 반달곰과 동강의 수달, 덕유산 주목과 금강산의 바위, 아직 가보지 않은 바다와 산, 늘 대하면서도 잊고 지내던 공기와 땅, 그리고 남태평양의 아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의 목소리까지도 사람들은 TV 환경 프로그램을 통해 새롭게 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느낌으로 이들을 접하고 있을까요? TV 환경 프로그램은 이들의 어떤 모습을 화면에 담고 있을까요? 혹시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보여주느라 정작 주인공들은 화면 밖으로 배제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환경 ‘문제’를 보여주기 전에 이들이 얼마나 가까운 이웃인지 느끼게 해준다면 시청자들은 이들의 문제에 공감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지구가 낯선 곳의 이웃들과 시청자들을 잇는 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시청자들이 마음을 열도록 배려할 수 있는 경륜이야말로 선배 프로그램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L 선배, 이건 좀 다른 이야깁니다만 하나지구에 예닐곱 개나 되는 기업 광고가 있다는 걸 며칠 전에야 알게 됐습니다. 칭찬이 자자하던 한 대담 프로그램에 한동안 광고가 하나도 없어 화제가 됐던 일이 떠오르더군요. 하나지구가 정말 인정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어려운 여건에서 고생하며 저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텐데…’하는 생각을 떠나 좀 더 냉정한 시각으로 하나지구를 보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시청자들의 까다로운 주문이 더 많이 쏟아지겠지요?

산이 푸르름을 드러내고 새 소리도 제법이군요. 어느덧 아침입니다. 곧 태어날 제 아이에게는, 어둠을 보여주기 전에, 감추어져 있지만 분명히 거기 있는 푸르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일전에 건강을 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셔서 좋은 방송 만드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