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와 출판::
‘수구 없는 한국 정치’를 기획하자 (2004.4)
서형원
2010. 2. 10. 20:34
4·15총선, ‘수구 없는 한국 정치’를 기획하자 서형원 / 녹색정치준비모임(www.greens.or.kr) 간사 우리 동네 모 후보의 지지율이 제법 반등했습니다. 이 양반 벌써 3선 도전입니다. 아침에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데 수구정당 소속인 이 현역의원도 물갈이해야겠고 진보야당도 밀어줘야 하겠고, 생각이 오락가락들 하나봅니다. 탄핵 망동에 분기탱천, 거리로 뛰쳐나온 열망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요? 투표로 심판하자고 마음을 다져보지만, 그저 한 표 던지는 걸로는 양이 차질 않습니다. 도시의 밤을 촛불로 수놓은 이 열망의 실체는, 시대의 흐름과 유권자의 의식에 한참 뒤떨어진 정치를 청산하자는, 수구·냉전·지역주의·개발독재·가부장·부패 정치를 더는 두고 봐 줄 수가 없다는, 너희들 사이에서 골라 찍으라는 건 주권자인 나에 대한 모독이라는, 유권자의 단순 명쾌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이 열망을 그저 추억으로 돌리지 말자는 의미에서, 저는 투표장으로 향하기에 앞서 저마다 ‘수구 없는 한국 정치’를 기획하는 유쾌한 시간을 갖자고 제안합니다. 수구 없는 한국 정치 ― 다소 선동적인 말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저마다의 상상과 사회적 토론 없이는 청산 그 자체도 힘을 받기 어려울 겁니다. 수구 없는 한국 정치, 어디로 갈 것인가? 간명하고 현실감 있는 세 가지 전망을 그릴 수 있습니다. 우선 미국형 정치구조입니다. 진보정당이나 녹색정당이 발붙일 자리가 없는, 신자유주의 일색의 양당 정치구조지요. 누가 이렇게 비유하더군요. 조선일보 대 중앙일보의 정치구도라고. (맙소사!) 미국 정치의 실패는, OECD 나라 중 가장 열악한 사회안전망과 평등 수준, 미디어 정치에 기반한 우민화의 성공, 환경·외교정책 등에서의 일방주의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정치구조가 자리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각자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유럽대륙형 정치구조입니다. 진보 대 보수의 양당 구조를 기본으로, 녹색당을 비롯한 소수정치세력이 연립정부의 정책 변화를 이끄는 등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정치구조입니다. 거기서도 시장만능주의가 점점 세를 얻어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다고 하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단단한 사회안정망, 활력 있는 시민사회, 에너지 전환 등 생태적 고려의 증대 등등, 유럽 정치구조가 한결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정치의 현실을 떠올리면 유럽형 정치구조를 부러워하지 않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곳에서 지구화되고 있는 세계와 파편화하고 있는 우리 삶에 관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지 질문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한 한에서 그것은 어찌 보면 한발도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악무한의 노력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하지만, 그저 우경화를 더디게 하고 있을 뿐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유럽이 현재의 수준을 유지하는 힘은, 그네들이 다른 민족과 자연으로부터 빼앗은 부를 포함해, 우리가 도달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물적 축적과 기술 우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구 없는 한국 정치’의 세 번째 전망은 우리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뒷심으로 하여 모색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고비마다 정치적 방향타의 역할을 해왔으며 대안적 가치와 정책을 제안해 온 시민사회운동, 거리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정치에서, 거리의 놀이에서 이 사회의 참된 주인임을 항상 입증해온 시민의 자발적 역량이 그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시민사회운동, 풀뿌리, 생활인 정치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장식품이 아닌 유력한 구성요소로 하는, 보수-진보-녹색의 세 발 위에 선 정치구조를 기획하자고 제안합니다. 녹색정치의 독자성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부장적 정치를 보완·극복하는 풀뿌리 생활인 정치, 성장과 분배라는 시계추를 넘어서는 생태적 발전 전망, 국가 수준에 집중된 정치로 담을 수 없는 지역과 지구의 정치 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치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선택, 즉 삶과 자연을 희생하는 성장 드라이브, 분배를 통한 성장,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길이라는 세 갈래 길 사이의 선택을 위해 벌여야 할 진짜 중요한 토론에 제대로 임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적 길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바로 그래서 ‘수구 없는 한국 정치’ 그리기라는 신나는 토론마당을 벌이자는 겁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다른 나라들이 걸어간 길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 나름의 전망을 창조한다는 야무진 기획에 공감한다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최악의 전망을 피하기 위해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이 원내에 힘있게 진입하고 멋진 활약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은 전망을 찾아가기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을 촉진하는 개방적인 정치구조를 추구하고 풀뿌리 생활정치를 뒷받침하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수구 정치는 퇴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표를 주는 것은 미련퉁이의 고집일 뿐이라고 주위에 말합시다. 더 나아가 저는 수구 없는 한국 정치가 가능하고 이제는 새로운 정치구조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선거에 임한다면 조금은 더 신나는 선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민의신문 2004.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