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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재편 논의 -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98.7)

서형원 2010. 2. 10. 00:23

전력산업 재편 논의 -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서형원 (환경운동연합 정책팀장)

장영식 한국전력 신임사장은 최근 언론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전기를 많이 쓰는 부유층에게 누진제를 적용하여 비싸게 전력을 판매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논리에 맞지 않다. 누진율을 완화하여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요금을 낮추겠다. 이를 위해 산업자원부 등 관계당국과 실무차원의 협의를 벌이고 있다.”
정권 핵심부와의 교감을 통해 한국전력의 구조조정을 이끌 것으로 주목받아온 장영식 사장의 이런 발언은 최근 진행되는 전력산업 재편 논의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전력산업 재편 논의는 경영 성과 개선과 경쟁력 회복 등 경제 논리에 철저히 국한되어 있으며 효율 향상이나 에너지 환경성 제고 등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또한 그러한 논의조차 한국전력과 관계 당국, 일부 전문가들 사이의 밀실 토론에 국한되고 있다. 지금 전력산업 재편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전력의 사업적 이익을 중심으로 얽혀있는 이해당사자들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전력 서비스의 수용자인 국민들과 환경단체, 일방적 발전·송전 사업의 피해자였던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단단하던 철옹성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환경단체들, 수많은 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굳건하던 전력산업 구조, 달리 말해 전력산업에 대한 한국전력의 배타적 독점 구조의 재편이 가시권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수십개의 외국회사들이 한전의 화력발전소 인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삼천포화력, 보령화력 등이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산업자원부와 재경부는 발전시장을 외국에 전면 개방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앞서 집권 여당은 한국전력을 발전, 송·배전, 판매 분야로 분할하거나 지역 분할한다는 구상을 내놓기도 했으며 장영식 사장도 취임전에 이와 유사한 한전개혁보고서를 산업자원부에 제출한 바 있다.
싫든 좋든 태풍의 중심부가 된 한국전력도 내부 대책기구를 구성해 구조조정에 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해집단 간의 밀고당김으로 우왕좌왕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배타적 권리를 향유하던 한국전력 완전독점의 전력산업 구조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이 글에서 필자는 현재의 전력산업 재편 논의를 밀실에서 끌어내어, 현재의 전력산업 구조가 어떤 원칙과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환경단체의 견해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한국전력과 관련 부처 간에 오간 많은 논의들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글은 다소 소박하게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지난 십여년간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현 전력산업의 반환경성과 비민주성에 맞서 제기해온 구체적인 문제의식에 기반하고자 한다. 전력산업은 단지 큰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사업분야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우선 현 전력산업 구조란 무엇을 말하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지금 전력산업 재편 논의를 독점한 사람들의 눈에는 96년(순이익 6천여억원)에 비해 20% 미만으로 떨어진 97년의 경영 성과와 100억달러에 달하는 한국전력의 외채, 연간 20억달러에 달하는 연간 원리금 상환부담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어 있다. IMF 구제금융 체제라는 경제위기가 배경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동안 독점에 안주하느라 비대해진 한국전력의 군살을 빼고 경쟁을 도입하겠다는 처방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기에 현 전력산업 구조란 우리 사회의 지속불가능성을 심화시킨 근본 원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핵에너지와 화석연료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으며 둘째, 대용량 집적발전과 원거리 송전 체계를 구조화하고 있으며 셋째, 수요관리가 실질적으로 배제된 공급위주의 전력산업이며 넷째, 근본적으로 이런 상황은 한국전력이라는 거대 독점기업에 의해 배타적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 또한 단지 경영성과의 미흡에 그치지 않는다. 첫째는 극심한 환경파괴이다.(환경적 지속불가능성) 앞으로도 2배 이상 확대할 계획인 화력발전은 연간 아황산가스 배출량이 32만9천톤(94년)에 이르며 세계 12위의 온실가스 방출국인 우리나라를 기후변화 주범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거대 발전소는 날이 갈수록 보존 가치가 입증돼가는 갯벌을 매립하여 들어서고 있으며 양수 발전소와 송전시설은 국립공원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산림 생태계를 훼손하고 있다. 전력 생산의 주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핵발전소는 방사능 오염 피해와 처리불가능한 핵폐기물의 누적이라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둘째는 사회적 갈등이다.(사회적 지속불가능성) 우리나라 전력산업은 법과 제도에 의해 배타적인 사업 권리를 확보하고 있으며 입지 선정이나 전력원 선택에 있어서 주민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발전소로 인한 환경파괴와 생존 터전 상실을 겪는 주민들의 저항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전력산업의 수혜자와 피해자가 분리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97년 한해에만 한국전력의 발전, 송전 사업으로 인한 피해와 분쟁 건수가 28건에 이르고 있다.
세 번째는 에너지 대외 의존이다.(경제적 지속불가능성) 97%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로 인한 연간 241달러(96년)의 에너지 수입액은 에너지 수급 불안정을 구조화하며 환율변동 등 국외적 변동에 취약한 요인이 되고 있다. 외환 위기 이전에 이미 핵발전소 1기의 외화부담은 137억달러, 중요발전소 122억달러, 유연탄화력발전소가 126억달러에 이르고 있었으며 한국전력의 외채는 국가 외채의 16%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리나라 전력산업 구조는 우리 사회의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지속불가능성의 구조적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전력산업 재편논의는 이런 총체적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경영성과를 높이는데만 주력하여 우리 사회의 지속불가능성을 심화시킬 뿐이다.

그런데 독점적 전력산업 구조의 재편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이미 지난 20여년간 진행된 전세계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력산업은 독점에서 경쟁으로, 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재편이 일어난 것은 소형 발전 기술의 발전, 주요 선진국에서 수요 증가 급감이라는 기술적, 경제적 조건도 이유가 되었지만 가장 큰 동인은 환경비용의 급증이다. 거대 독점기업의 주요 전력생산원은 화석연료와 핵에너지였는데 화력발전소는 환경파괴, 특히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탄소세가 도입되고 증설이 억제되는 등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핵발전소는 체르노빌 참사와 미국 드리마일 핵사고 이후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더 이상 계획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막대한 투자와 산업 전환,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전략적 투자에 나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우리나라 전력산업 구조의 모습과 문제점, 세계적 추세를 참고한다면 전력산업 재편 문제를 단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 논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전력산업 재편은 지구적 환경위기의 극복,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의 성취라는 전략적 목적의식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나라 전력산업 재편의 방향을 짚어보도록 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전력산업의 위기만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초래한 한국전력이라는 독점적 이해집단을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전력에 의한 환경파괴와 주민 피해에 대해선 수없이 지적한 바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독점구조가 대형 화력발전소, 핵발전소 건설을 통해 에너지 비효율을 주도하며 재생가능에너지 도입이나 에너지 효율 향상이 가져올 획기적인 변화를 인위적으로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종래의 대규모 발전시설을 이용한 중앙집중적 전력공급방식을 무너뜨리고 소규모의 분산적 전력생산 및 공급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거대 독점 전력기업의 기반을 위협하는 변화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재생가능에너지에 관심을 보이는 전력회사는 총 3200개의 전력회사 중 소규모 지방공사 형태의 전력공급업체들이며 지역분할을 통해 전력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 재생가능에너지의 도입에 소극적인 소극적 또는 저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전력 독점 구조의 해체는 기득권 집단의 해체를 의미하므로 막연히 자연적인 과정에 맡겨놓을 수 있는 것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선 한국전력의 외채도입에 대한 정부의 지급보증을 중단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전력의 외채를 국민의 세금으로 책임지는 현재의 불합리를 깨야 공정한 경쟁도 가능하며 변화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독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전원개발에관한특례법’, 국가독점을 명시한 ‘한국전력공사법’, 실질적인 진입장벽을 법제화한 ‘전기사업법’ 등은 폐지, 개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업자에게 동등한 기회와 조건을 주기 위한 전제이다.
전력산업 재편 논의의 일각에서 일본식 지역분할을 통한 과점이나 해외 매각이 대안으로 논의되는 것도 우려되는 점이다. 지역분할의 문제점은 위에서 지적한 바 있으며, 지금 조건에서의 발전소 해외 매각은 이윤 보장을 위한 환경규제의 유보, 완화, 주민 참여의 봉쇄라는 문제를 초래할 위험성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의 독점이 해체되기 시작한다면 사기업이 자유로운 시장진입을 가능하게 하되 특히 소규모 전력생산자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해야 할 것이며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에너지 효율 향상, 친환경적 전력원 개발에 특화된 지방전력공사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주민 참여를 전제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또한 전력산업 재편은 에너지 효율의 획기적인 향상과 친환경적인 미래의 에너지원, 즉 재생가능에너지의 확대라는 전략적 방향을 분명히 하고 추진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독점을 정당화하는 규제는 철폐하되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전력산업의 환경성을 높이기 위한 규제는 도리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전기요금의 경우에도 우리나라는 비정상적으로 낮게 되어 있으므로 도리어 정상화를 통해 에너지 효율성에 대한 투자와 기술 향상에 대한 유인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 환경비용이 에너지 가격에 포함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기요금에는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미래지향적인 전력공급사업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절약 비용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재생가능에너지원을 통한 전력 생산자에 대한 국가 전략적 차원의 지원과 우대 정책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가격과 질 면에서 일정한 요건을 갖춘 재생가능에너지 생산자에 대해선 송배전 업자가 우선 구매하도록 해야 하며 정부 전력 조달에 있어서 우선 구매를 실시하는 외국의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전력 구매자가 자발적으로 좀더 높은 가격으로 재생가능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녹색가격(Green Pricing) 제도의 도입도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현재의 조건에서는 전기요금의 일부를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도록 제도화하는 것도 도입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에게 전력원과 전력업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다.

현재 발전 시설이 엄청 남아돌고 있으며 전력산업 재편의 호기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자. 한전은 현재 내재적으로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이러한 시기에 기존의 기득권 집단의 생존 전략 차원으로 전력산업 재편이 전락하지 않도록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며 그 동력은 그동안 소외돼온 진정한 당사자, 국민과 환경단체의 적극적인 참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전력산업 재편 논의는 한국전력과 정부 간의 폐쇄적인 논의에 머물고 있다. 가이사의 가이사에게 국민의 것은 국민에게 돌려야 한다. 전력은 모든 국민에게 필요한 것. 전력산업을 한국전력이라는 특정 이익집단의 소유물에서 국민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지금 정말 해야 할 일이다.

(함께사는길 98.7)